Top PageBrief Summary of World HeritageHistory and Brief Summary of HiraizumiIntroduction of Cultural Assets in HiraizumiAccessTourism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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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세기말 오슈 후지와라 씨의 일대손 기요히라는 본거지를 이와테현 남쪽의 에사시에서 히라이즈미로 옮겼습니다. 히라이즈미가 수륙교통의 요충지이며 다양한 식물이 혼재하는 남북 자연의 교차점이라는 특징을 파악하고 이곳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기타카미가와 강 동쪽 강가지역에 대곡창지대가 있었는데 그것도 요인에 하나였을 것이라고 최근에 판명되었습니다.
 히라이즈미에 온 기요히라는 처음에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것이 간잔 주손지 절 조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탑의 건립은 기요히라의 이상향 건설에의 의지 표명이며, 히라이즈미가 도호쿠 지방의 중심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기요히라의 통치 범위는 남으로 후쿠시마현 시라카와세키, 북으로 아오모리현 소토가하마까지였습니다. 시라카와세키는 북위 37도, 소토가하마는 41도, 그리고 주손지 절은 39도에 위치하는데 이 위도를 통해 히라이즈미가 도호쿠 지방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오슈 후지와라 씨는 지네 퇴치로 유명한 다와라토타와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기요히라의 부친 츠네키요는 와타리노 곤다이후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 미야기현 남부를 본거지로 한 호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1세기 중엽, 도호쿠 지방의 호족 아베 씨와 조정 간에 젠쿠넨 전투가 있었을 때, 츠네키요는 아베 씨 편에 가담했습니다. 아베 씨가 패배함에 따라 츠네키요도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요히라도 부친과 함께 죽을 운명이었으나, 모친이 그를 데리고 적군이었던 기요하라 씨에게 재가하게 되면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후에 기요히라는 기요하라 씨 집안의 가독상속싸움인 고산넨 전투에 말려들게 됩니다. 그 전투에서 기요히라는 유일하게 살아남았으나, 그 과정에서 의붓동생에게 처자가 살해되는 등 골육상잔의 참상이 빚어졌습니다.
 기요히라는 평화를 결의하고 히라이즈미에 주손지 절을 건립했습니다. 1124년에 곤지키도 당, 1126년에 주요 당・탑이 모두 완성되자 대법회를 열었습니다. 그 석상에서 기요히라는 전쟁이 없는 이상향을 만들고 싶다는 뜻이 담긴 글을 낭독했다고 합니다. 그 2년 후, 임종을 맞이한 기요히라는 미이라로 곤지키도 당내에 안치되었습니다.

 2대 모토히라는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모츠지 절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모츠지 절 주변을 교토의 도바・시라카와와 같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모츠지 절의 본존 작성의 사례기록을 통해 모토히라 시대에 이미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을 개척하여 연못을 만들고, 전면에 알돌을 깔아 가람을 만드는 일은 극히 힘든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와가초무소(우리나라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라고 칭송된 금당 엔류지 절은 완공되나 전체가 완성되는 것은 보지 못한 채, 뇌출혈로 1157년에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3대 히데히라에 의해 모츠지 절은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히데히라는 현재의 야나기노고쇼 유적 부근을 재정비하기 시작해 무료코인, 가라노고쇼, 히라이즈미노 다치라는 히라이즈미의 정치적 중핵부를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중요한 곳에 대사원을 둔 거점 히라이즈미가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히라이즈미의 위용은 역대 지도자들에 의해 갖추어졌습니다. 일대손 기요히라가 건립한 주손지 절에서는 탑과 높이가 무려 15m나 되는 니카이다이도 당이 주위에 위엄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2대손 모토히라와 3대손 히데히라가 건립한 모츠지 절에서는 폭이 30m에 달하는 큰 도로와 정연하게 교차하는 도로, 즐비하게 늘어선 보물창고, 왕래하는 우차가 보는 이를 압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후지와라 씨의 이상향 건설은 주변부까지 이르러 주변 산들에 경전을 매장한 무덤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주변 환경도 정비했습니다. 동쪽의 다바시네야마 산에는 나라의 요시노야마 산과 견줄 만한 벚꽃 경치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초대 기요히라로부터 계승된 히라이즈미의 이념은 불교로 평화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궁극적인 모습은 무료코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당은 극락의 궁전을 의미하고 정원은 극락세계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것들은 방대한 양의 금 생산과 남북교역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풍부한 재력이 아낌없이 투자되어 히라이즈미가 성립된 것입니다.



 히데히라는 1187년에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임종 직전에 아들들에게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필두로 형제간에 힘을 모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싸워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1189년 4월, 4대 야스히라는 요리토모의 압력에 굴복하여 요시츠네를 곤경에 빠뜨려 자살하게 만들었고, 6월에는 요시츠네와 절친했던 동생 다다히라마저도 살해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 가마쿠라를 출발한 요리토모의 대군은 8월에 히라이즈미에 진주하였고, 9월에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켰습니다.
 히라이즈미는 후지와라 씨라는 비호자를 잃게 되자 점차로 쇠퇴해 갔습니다.  1226년에 모츠지 절의 엔류지 절, 1337년에 주손지 절의 주요 당・탑이 차례로 소실되었는데 1600년경 복원을 통해 현재의 상태가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의 건물 대부분은 재로 변해 유적화되었고 정원 등은 농경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히라이즈미 사람들은 후지와라 씨의 자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유적을 양호한 상태로 현재까지 보전해 왔습니다. 또한 전통 춤 등의 예능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히라이즈미의 문화유산’은 번영했던 과거의 흔적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